1. 하회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배꽃이 만발한 동네 ‘이화촌’이라고도 하였으며, 물과 들, 산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좋은 땅 중의 하나로 꼽았다. 고려시대에 허씨, 안씨, 배씨 등이 살았는데 고려말 조선초기에 풍산유씨들이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으며, 이들 풍산유씨들을 하회유씨라고도 일컬었다. 안동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상징공간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써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교감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소통을 통해 흐트러짐 없는 건전한 공동체적 삶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재되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민속마을로 마을의 입지와 배치는 조선시대 초기의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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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줄불놀이

한여름 밤이면 하회의 선비들은 부용대 앞 강가에 배를 띄우고 품격과 운치가 있는 시회를 즐겼다. 자연을 벗 삼아 서로에게 술잔을 건네고 시가 보태어지고, 흥이 오르면 선유줄불놀이가 펼쳐진다.
강 위로 폭죽이 터지듯 불꽃이 시작되고, 바람이 불 때 마다 불꽃비가 한없이 모래사장으로 내린다. 강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낙화야'라고 외치면 그 소리에 맞춰 큰 불덩이가 절벽을 타고 떨어진다. 강둑 위에는 각자의 소원을 실은 계란불이 강을 뒤덮어 내려온다. 이 장관 앞에 저절로 불멍이 되고, 힐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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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별신굿탈놀이

선유줄불놀이가 선비들의 놀이였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서민들의 놀이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2세기 중엽부터 상민들에 의해서 연희 되어온 탈놀이다. 10년에 한 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서낭신을 모시고 별신굿을 해왔는데, 굿과 아울러 탈놀이를 하였다.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는 제례의 일환이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마을의 안녕을 가져다주는 것은 곧 마을을 지키는 동신(洞神)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었다. 하회마을은 화산 중턱에 서낭당이 있고, 마을 중턱에 국사당이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 삼신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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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탈

하회탈은 12세기부터 유지되어 왔다. 화재와 전쟁, 유실에 대한 위험성을 다 견뎌내고 지역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 덕분으로 지켜왔다.
한국 가면극의 탈들은 바가지나 종이를 붙여서 만들고 탈놀이가 끝난 후에는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태워 버렸다. 반면 하회탈의 경우는 오리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동사에 목궤로 보관해두었다가 다음 별신굿 때 다시 사용해왔다. 오리나무로 조각한 후 한지를 바르고 옻칠을 했기 때문에 습기와 해충을 막아 주었다. 또한 탈은 마을의 서낭님을 위하는 신성한 것이라는 금기가 잘 지켜졌고, 수백년동안 잘 보존 전승되는데 역할을 하였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탈은 양반, 선비, 중, 백정, 이매, 초랭이, 부네, 각시, 할미탈과 주지탈 2개로 모두 11점이 있다.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은 유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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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배도

문배도는 정월 초하룻날 궁궐에서 한 해의 질병과 재난을 막기 위해 붙인 그림이다. 2021년 2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가 설 연휴 기간동안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광화문에 금갑장군(황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 그려진 문배도를 붙였다. 이는 미국서 발굴된 140년 전 사진 속 광화문 전경 사진을 단서로 하여 안동 풍산류씨 소장본을 바탕으로 광화문 금갑장군 문배도를 복원시켰다.

이 문배도의 완형은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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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가이면서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종택이다. 양진당은 사랑채 정면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1515∼1573)의 호를 따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류중영은 류운룡의 아버지다. 당호를 양진당이라 부른 것은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柳泳:1687∼1761)이 종택을 크게 중수하고 겸암의 유고를 모아 『겸암문집』을 간행하고, 풍산류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 간행하는 등 문중 활동을 활발히 벌인 공이 커 그의 호를 붙였다. 류운룡은 류성룡의 형으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퇴계 선생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와 사색에 정진하기 위해 서재를 만들었다. 퇴계는 제자의 서재를 겸암정이라 이름짓고 손수 편액을 써서 보냈다. 성품이 곧고 겸손하여 붙인 이름이다.
출처: https://ncms.nculture.org/ 역사문화유산 선비 문화의 산실,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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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보물로 지정된 충효당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택이다. 선생 사후에 지은 집으로 류성룡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1598~1674)가 류성룡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에 평소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뜻이 전해진다.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林間一鳥啼不息]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門外丁丁聞伐木]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一氣聚散亦偶然]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只恨平生多愧怍]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거라[勉爾子孫須愼旃]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忠孝之外無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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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

부용대는 ‘연꽃을 내려다보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하회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64m의 절벽으로 낙동강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회마을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부용대이며, 그 허리 부분에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연결하는 층길이 나 있는데 이 길로 형제가 왕래하며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유원지(柳元之:1598~1674)는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어 ‘하회16경’(下回十六景)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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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도령 설화

마을에 재앙이 닥치자 그를 극복하기 위해 탈을 만들라는 계시를 받은 허도령은 탈을 완성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만나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허도령과 사모하는 사이였던 김씨 처녀가 허도령을 몰래 들여다보게 되고,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김씨 처녀 또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결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픔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 의성김씨 처녀를 위로하고자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다. 매년 마을동제(마을의 안녕을 위하는 제사)때 의성김씨 처녀를 신으로 맞이하고(각시탈), 허도령이 만든 탈을 마을사람들이 쓰고 춤을 추는 축제를 펼친다. 마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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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불천위제사란 일반적으로 4대조까지만 올리는 제사의 관례를 깨고 5대조, 6대조가 되어도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위패를 모셔 두고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제사를 말한다. 불천위의 자격은 학문이 탁월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한 대학자나 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킨 충신, 후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만큼 탁월한 행적을 남긴 사람에 한정하여 주어진다. 불천위 제사가 있다는 것은 가문의 최고 명예를 보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의 류씨 문중에는 입암공(立巖公) 류중영(柳仲郢), 구촌공(龜村公) 류경심(柳景深), 파산공(巴山公) 류중암(柳仲菴), 문경공(文敬公) 류운룡(柳雲龍),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 등 불천위가 무려 5위나 된다.
자료-디지털안동문화대전/ 집필자 임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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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정

조선 선조때 겸암 류운룡(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이라 한다. 현재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송정은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지역민의 휴식과 힐링의 공간이자 지속적으로 보존 활용되어야 할 자긍심의 공간이다. 솔향 가득한 만송정 안에 들어오면 숲이 주는 축복을 온몸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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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다리

겨울철이나 강물 수위가 높지 않아 배 운행을 할 수 없을 때 마을 주민들이 통행을 위하여 설치한 다리이다. 보통 참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상판을 나무로 엮은 뒤 그 위에 솔가지 같은 섶을 깔고 흙을 덮었다.
만송정에서 부용대까지 이어지는 섶다리를 걸어보면 부용대의 장엄한 자태를 마주하고, 사람도 자연도 한마음이 되어 낙동강을 유영한다. 아쉽게도 현재는 태풍으로 유실되면서 현재는 안전상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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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정사(遠志精舍)

서애 류성룡은 부친상을 당하자 조정에서 물러나 이 곳에 원지정사를 짓고 학문을 했던 곳이다. 서애 선생이 병이 났을 때 요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지정사의 서쪽에는 누로 된 연좌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누에 오르면 부용대와 화천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원지는 ‘심기를 다스리고 번거로움을 제거하기 위함’이란 뜻을 담고 있다. 마음의 번거로움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면 원지정사 연좌루에서 마주하는 이 평온한 풍광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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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당 신목

하회마을 중앙에는 마을을 지켜온 사람들의 기도와 마음을 안아온 삼신당 신목이 있다. 사람들은 삼신당을 성스럽게 여겨 소원을 빌고 마을의 안녕을 바래왔다. 지금까지도 이 나무에는 누군가의 소망과 꿈이 소원지에 매달려 있다. 묵묵히 한자리를 지키고 서서, 자신의 드넓은 몸통으로 그들을 안아주고, 무성한 이파리로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하나 보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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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당 노송

옛 풍남초등학교 자리에는 수백 년 된 노송이 있다. 원래 화수당이 있던 자리로, 3.1운동이 일어나던 때에 이 소나무 앞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옛 어른들의 기개와 기백을 그대로 품고 있는 노송은 굳건하게 자리하며 하회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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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

옥연정사는 국보 징비록이 쓰여진 역사의 현장이다. 서애 류성룡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한 것을 승려 탄홍(誕弘)이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다고 하여 지어졌다. 서애는 옥연정사의 건물과 방, 마루에 이름을 붙였다. 서애 선생이 기거하며 징비록을 저술한 곳은 원락재(遠樂齋)로 논어(論語)에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가져왔다. 서당채는 세심재(洗心齋)’라 하여 《주역》에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는 데서 따왔고, 대청은 감록헌(瞰綠軒)’이라 이름 붙이고. 왕희지의 난정서시(蘭亭敍詩)에서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로는 푸른 물굽이를 내려보네’(仰視碧天際 俯瞰綠水濱)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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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이다. 난중일기와 함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 ‘징비’란 말은 ‘지난날을 경계하고(懲) 뒷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毖)’는 뜻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참혹했던 전쟁의 이야기와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반성하는 기록들을 담고 있다. 『징비록』 서문에는 “나 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정의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국가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잡지 못했다.” 는 부끄러움과 “초야(草野)에서나마 못내 국가에 충성을 바치려는 나의 뜻을 내보이고, 또 못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한 나의 죄를 드러내려는” 반성의 기록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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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후잡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후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하회유씨문서'에 들어 있다. 이도 징비록과 같이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같은 재앙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난후잡록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완전하게 끝이 맺어진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후잡록에 실린 내용들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징비록이나 타도서에 수록 되었다. 따라서 이는 징비록의 초고라 볼 수 있기에 매우 가치 있는 값진 역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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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년과 계사년 두 해 동안에 있었던 사실, 즉 왜적의 동태, 명나라 장수와 우리나라 장수들의 작전 태세, 군량의 수집 보급, 무기의 조단, 군인들의 논공행상 등 전쟁수행에 관련된 각종 문제에 대한 대책 등을 조정에 보고 또는 건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을 베껴서 엮은 책이다. 진사록은 선생의 자질이나 문인들이 옮겨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서애 선생이 교열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목(題目), 책의 칸 밖이나 각 편 끝부분에 감회나 의견을 직접 기록해 놓았다.

출처 : 병산서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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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문등록

서애 류성룡이 1595년 10월~1596년 12월까지 군무에 관한 공문을 모아 엮은 이 책은 중책을 맡고 있던 저자의 주변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군사 문제를 비롯한 정치.경제 및 대일 관계 등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북방 국경의 경비에 관한 기사도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점차 일어나고 있던 청나라와의 교섭과 만주와의 관계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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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포집

1594년 5월~1598년 10월까지 국왕에게 올린 계문.상소 등을 수록한 정책서.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이 책의 편찬 동기나 목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수난'으로 인식하는 피해 의식으로부터 '주체적 극복'으로 시각을 전환시키고자 할 때 참고할 만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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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집

서애 류성룡의 문집. 임진왜란이나 저자의 학문 사상 관계 부문을 중점적으로 발췌하여 국역하였다. 임진왜란 중의 주요 사건과 당시의 일화 무용담을 기록한 글들을 통해 당시의 대명 관계와 정치적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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