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회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배꽃이 만발한 동네 ‘이화촌’이라고도 하였으며, 물과 들, 산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좋은 땅 중의 하나로 꼽았다. 고려시대에 허씨, 안씨, 배씨 등이 살았는데 고려말 조선초기에 풍산유씨들이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으며, 이들 풍산유씨들을 하회유씨라고도 일컬었다. 안동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상징공간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써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교감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소통을 통해 흐트러짐 없는 건전한 공동체적 삶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재되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민속마을로 마을의 입지와 배치는 조선시대 초기의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선유줄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선유줄불놀이가 선비들의 놀이였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서민들의 놀이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2세기 중엽부터 상민들에 의해서 연희 되어온 탈놀이다. 10년에 한 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서낭신을 모시고 별신굿을 해왔는데, 굿과 아울러 탈놀이를 하였다.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는 제례의 일환이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마을의 안녕을 가져다주는 것은 곧 마을을 지키는 동신(洞神)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었다. 하회마을은 화산 중턱에 서낭당이 있고, 마을 중턱에 국사당이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 삼신당이 있다.
하회탈


문배도
문배도는 정월 초하룻날 궁궐에서 한 해의 질병과 재난을 막기 위해 붙인 그림이다. 2021년 2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가 설 연휴 기간동안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광화문에 금갑장군(황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 그려진 문배도를 붙였다. 이는 미국서 발굴된 140년 전 사진 속 광화문 전경 사진을 단서로 하여 안동 풍산류씨 소장본을 바탕으로 광화문 금갑장군 문배도를 복원시켰다.
이 문배도의 완형은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양진당


충효당
보물로 지정된 충효당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택이다. 선생 사후에 지은 집으로 류성룡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1598~1674)가 류성룡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에 평소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뜻이 전해진다.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林間一鳥啼不息]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門外丁丁聞伐木]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一氣聚散亦偶然]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只恨平生多愧怍]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거라[勉爾子孫須愼旃]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忠孝之外無事業]
부용대


허도령 설화
마을에 재앙이 닥치자 그를 극복하기 위해 탈을 만들라는 계시를 받은 허도령은 탈을 완성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만나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허도령과 사모하는 사이였던 김씨 처녀가 허도령을 몰래 들여다보게 되고,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김씨 처녀 또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결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픔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 의성김씨 처녀를 위로하고자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다. 매년 마을동제(마을의 안녕을 위하는 제사)때 의성김씨 처녀를 신으로 맞이하고(각시탈), 허도령이 만든 탈을 마을사람들이 쓰고 춤을 추는 축제를 펼친다. 마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불천위


만송정
조선 선조때 겸암 류운룡(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이라 한다. 현재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송정은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지역민의 휴식과 힐링의 공간이자 지속적으로 보존 활용되어야 할 자긍심의 공간이다. 솔향 가득한 만송정 안에 들어오면 숲이 주는 축복을 온몸으로 받는다.
섶다리


원지정사(遠志精舍)
서애 류성룡은 부친상을 당하자 조정에서 물러나 이 곳에 원지정사를 짓고 학문을 했던 곳이다. 서애 선생이 병이 났을 때 요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지정사의 서쪽에는 누로 된 연좌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누에 오르면 부용대와 화천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원지는 ‘심기를 다스리고 번거로움을 제거하기 위함’이란 뜻을 담고 있다. 마음의 번거로움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면 원지정사 연좌루에서 마주하는 이 평온한 풍광을 추천한다.
삼신당 신목


화수당 노송
옛 풍남초등학교 자리에는 수백 년 된 노송이 있다. 원래 화수당이 있던 자리로, 3.1운동이 일어나던 때에 이 소나무 앞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옛 어른들의 기개와 기백을 그대로 품고 있는 노송은 굳건하게 자리하며 하회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옥연정사


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이다. 난중일기와 함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 ‘징비’란 말은 ‘지난날을 경계하고(懲) 뒷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毖)’는 뜻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참혹했던 전쟁의 이야기와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반성하는 기록들을 담고 있다. 『징비록』 서문에는 “나 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정의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국가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잡지 못했다.” 는 부끄러움과 “초야(草野)에서나마 못내 국가에 충성을 바치려는 나의 뜻을 내보이고, 또 못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한 나의 죄를 드러내려는” 반성의 기록이라고 적고 있다.
난후잡록


진사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년과 계사년 두 해 동안에 있었던 사실, 즉 왜적의 동태, 명나라 장수와 우리나라 장수들의 작전 태세, 군량의 수집 보급, 무기의 조단, 군인들의 논공행상 등 전쟁수행에 관련된 각종 문제에 대한 대책 등을 조정에 보고 또는 건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을 베껴서 엮은 책이다. 진사록은 선생의 자질이나 문인들이 옮겨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서애 선생이 교열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목(題目), 책의 칸 밖이나 각 편 끝부분에 감회나 의견을 직접 기록해 놓았다.
출처 : 병산서원 홈페이지
군문등록


근포집
1594년 5월~1598년 10월까지 국왕에게 올린 계문.상소 등을 수록한 정책서.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이 책의 편찬 동기나 목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수난'으로 인식하는 피해 의식으로부터 '주체적 극복'으로 시각을 전환시키고자 할 때 참고할 만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애집

세계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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